고어로 득도하기 :: Pifan, 마터스

※경고1 : 잔혹 이미지가 일부 함유되어 있으므로 주의할 것
※경고2 : 마터스에 대한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핵심적인 개념 및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주의할 것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고어물. 석가모니와 관련된 유명한 설화중 '할육무합(割肉貿鴿)'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민간인(부처가 아니란 말이지, 평민이 아닌 왕족이었다;;;)이었을 시절의 이야기로, 그가 시비왕(毘王)이라는 칭호를 지니게 된 일화이기도 하다. 내용은 이렇다.

어느날 비둘기 한마리가 독수리에게 쫓기어 시비왕의 품속으로 날아들어오며 구조를 요청한다. 시비왕은 비둘기를 자신의 몸속에 품으며 독수리에게 비둘기를 살려달라 부탁한다. 독수리는 어이가 없어 항변한다. 아니 무슨 내가 풀을 뜯어먹을 수도 없고, 난 원래 고기를 먹어야 살 수 있는데, 기껏 다잡은 비둘기를 놓아주라니, 나보고 죽으라는 이야기냐.  시비왕은 독수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신 비둘기 만큼의 자기의 살을 독수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다.

시비왕은 품속에서 저울을 꺼낸다. (왕인거야; 상인인거야;). 한쪽에 비둘기를 올려놓고, 칼을 꺼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듬뿍 베어 반대쪽에 올린다. 분명 비둘기보다 많이 잘랐는데도, 저울은 비둘기쪽이 더 무겁다. 그는 다시 반대쪽 허벅지 살을 베어 올린다. 여전히 비둘기가 더 무겁다. 이번에는 팔의 살을 베어 올린다. 반대 팔도 벤다. 여전히 무겁다. 가슴살도 베어 올린다. 그래도 비둘기가 더 무겁다. 온 살을 발라내도 비둘기가 무겁자, 그는 드디어 자신의 몸 전체를 저울위에 올린다. 그 뒤로는 다소의 종교적 판타지. 독수리와 비둘기는 사리지고 천지에 향기가 퍼지고 등등. 중요한건 이 계기를 통해 그는 이후 해탈을 하고 득도하여 부처가 되게 됬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오늘 이 고사에 주목한 이유는 이거다. 종교적 설화에 자주자주 등장하는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잔인함속에 들어있는 메시지. 고통에 대한 시선이다. 생각해봐라. 무슨 전신마취를 한 것도 아니고, 본인의 몸으로 라이브하게 육사시미를 뜨는데, 저렇게 끝까지 조목조목 진행하는건 말도 안되는 허구다. 저러고도 살수 있느냐는 접어두더라도, 저 엄청난 고통을 인간이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냔 말이다. 아무리 종교적 설화지만, 너무 리얼리티가 떨어지는데? 

여기서 중요한 관점이 하나 있다.
불교를 비롯한 몇몇 동양권의 참선적 종교에서,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육체를 초월하는 현상을 동반한다. 해탈이라고도 하는 이 현상은, 정신을 육체로부터 독립시켜 철저히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 가능한 경지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만 진리에 접촉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육체를 초월했다는 것은 몸의 확장적의미로써 모든 사회적 관계를 통한 욕정과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차원적인 초월이다. 해탈을 통해 물리적으로도 육체로부터 독립되는데, 자신의 육체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위해와 고통으로부터도 자유로진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괴로워하지 않고, 관조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그저 종교적 상상력이라고 보기 어렵게 만드는 사례들은 도처에 있다. 독재에 항변하며 앉아서 몸에 휘발유를 붓고 정좌하여 분신한, 베트남 승려의 모습은 분명히 육체를 초월한 모습을 극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우린 저 엄청난 고통을 산들바람인양 그저 만끽 할 수 없다. 겪어보진 못했지만, 저건 그저 참을성만으로 견뎌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다. 그가 도를 깨우쳤는지야 우린 알수 없지만, 적어도 육체를 초월하여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육체의 초월이 저런 상황을 견뎌내게 하는 것이라면, 시비왕처럼 제 살을 도려내는 일도 침착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통은 깨달음, 해탈에 대한 일종의 인증이기도 하지만 (오 고통으로부터 의연해? 득도 1급시험 합격!),  아주 중요한 또 다른 역활이 하나 있다.

고통은 깨달음에 이르르는 도구이기도 하는 것. 
고통은 육체의 초월을 도울 수 있고, 이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를 수 있다는 믿음은 도처에 있다. 갖은 방법, 상상 가능한 온갖 잔혹함으로 신체적 고통이 주어지고, 이를 통해 육체를 초월하고 깨달음을 얻어 신적 지위에 오르는 이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설화와 신화속에 존재한다. 사실 설화뿐 아니라 고통은 실제 수행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인도 수행자들의 온갖 자기학대는 우리 모두 치를 떨 정도로 많이 알고 있다. 힌두교나 지이나교 등 이원론적 종교에서는 이러한 자기학대적 고통은 필수적이다. 구도의 도구일 뿐 아니라, 내세에 복을 받는 지름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고통은 종교적 꼭지점에 이르기 위한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설화적 차원에서 보자면 십자가에 메달린 예수의 온갖 수모와 고통도, 깨달음을 촉진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고통끝에 그는 말한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마도 아버지 하나님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다 너 좋으라고 하는 일이야. 득도하라고. 그로 인해 그는 모든 인간의 죄를 씻어내고, 스스로도 3일만에 부활했다고 전해진다.

왜 고통을 깨달음의 도구로 믿는 걸까. 인과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고통은 나중에 받을 떡을 위한 일종의 댓가인 것이다. 육체에 대한 부정도 아마 배경이 되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내세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현세의 속박인 육체는 부정의 대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근대적  관점에서 우리는 '고통'이 뉴런을 통해 뇌에 전달되는 정보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통은 시냅스간 화학작용의 연쇄일 뿐이다. 사실 원론적으로 보자면 고작 '정보'에 우리가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에게 매우 괴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름조자 '고통'인 것이다. 정보인 고통이 괴로움이라는 피드백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생존을 담당하는 표층의식이 내보내는 일종의 경고 시스템때문이다.  우리가 자상을 당하거나, 팔을 잘리거나, 육식동물로 부터 다리를 물렸을 때, 이때의 고통은 개체의 안녕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 상황을 매우 큰 사이렌으로 스스로에게 알려 이를 회피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게 할 필요가 있다. 고통이라는 정보를 괴로움으로 받아들이게하는 것은 생존을위해 설계되어진 본능이라는 부분의 자아다.

우리가 현재 느끼고 있는 자아라는 물건은 우리 스스로는 하나로 인지하고 있지만, 사실은 대단히 복합적으로 구성된 물건이다. 특히 육체와 관계되어있는 외부 정보 시스템적인 측면에서 형성된 자아(이를테면 고통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며 두려워하는 녀석)은 우리 표층의식의 큰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는 원시적인 생물체에서 부터 진화에오며 가져온 가장 강력한 프로토콜이므로 우리가 이를 벗어나 사고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느끼고 있다. 우리의 자아에는 외부 정보시스템적인 측면을 제거한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이 형이상학적이고, 순수 이성적인 자아의 부분을 믿음에 따라, '영혼'이라고 불러도 좋고, '논리'라고 불러도 좋고, '아이디어'라고 불러도 좋다.나는 편의상 A라고 부를란다. 여튼 수많은 참선적이고 구도적인 종교에서는 자아의 주도권을 A에게 넘겨주어야  진실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고행은, 고통의 괴로움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한 트레이닝이다. 만약 극단적이고 지속적인 고통이 주어진다면, 그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이 괴로움은 그저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자아의 주도권은 'A'에게 넘어가지 않을까? 그리고, 그 순간 우린 순수한 정신세계와 조우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이 아이디어가, 마터스의 가장 핵심적인 구성요소라고 생각한다.

이번 13회 PIFAN의 심야상영으로 기대해 마지 않았던 마터스를 만났다. 새벽12시부터 연속 세편 상영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마지막 작품이 마터스였다. 첫번째 영화는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들이 살인마로 돌변하는 깜놀공포영화 'the children'이있고, 두번째 영화는 내장과 두개골이 난무하는 엄청난 고어물이지만 나름 유쾌했던 독일영화 'dead snow'였다. 이러니 마터스를 볼 무렵은 이미 내 머릿속은 일종의 호러 하이퍼 상태였다;; Martyrs의 장면 장면을 쫙쫙 흡수했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마터스를 보고 나오자, 아마도 '천국을 보는 눈'이라는 어이없는 부제를 붙인(일종의 사죄성 부제같다) 영화사에서 주최한 듯한 간단한 설문에 응해야 했었다. 이 영화는 최근에 본 호러 영화중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를 호러 매니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뭐 이런식의 설문에 체크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설문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오류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호러영화가 아니다.

눈뜨고 볼수 없는 끔찍한 장면과 집요한 폭력씬이 점철되어 있기는 해도, 그래서 끔찍하고 징그럽다고 호러영화는 아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는 자토이치가, 혹은 '돌이킬 수 없는'이 호러영화여야 한다. 호러 영화는 끔찍하거나 잔인한 장면, 혹은 공포심 자체를 즐기기 위한 영화다. Martyrs는 내가 앞서말한 A에 접촉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호러적 화법으로 풀어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순수한 정신으로 보고자 한 것이 고작 사후세계냐라는 것은 서양인이 빈약한 상상력 탓이라고 치고, 그렇게 궁금하면 본인이 하지 왜 남에게 시키냐는 도덕적 판단은 뒤로 한다면, 이 영화는 굉장히 순수한 탐구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 사이의 공간을 고통을 매개로 하여 깊숙히 탐험하고 있다. 고통에 대한 공포는 육체를 지키게 하기도 하지만, 인간 정신의 알수없는 곳에 영향을 미치고 스스로의 육체를 학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우린 몸을 지키기위해 설계된 고통으로 인해 몸을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얽힐데로 얽혀있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사이에 고통은 경계자로써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의문이 있다면, 안나를 진짜 순교자처럼 담아낸 감독의 앵글은,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영화적 표현이었을까.


아마도 진심이지 싶다. 이장면을 보면서, 왠지 서두에서 말했던, 할육무합의 고사와 이 이미지가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이 영화에서 인용되었던, 수전손택의 '타인의 고통'에도 나왔던, 그 유명한 능지처참의 사진의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진짜 저 높은 곳을 보고 있다. (능지처참 사진은 오히려 극단의 고통과 극단의 쾌락이 지니고 있는 유사성이 주는 충격으로 기억된다. 뒤틀린 에로스를 담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그녀를 부처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피의 석가모니. 어쩌면 그는 고통이 해탈에 이르르는 묘약이라고 진짜로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좀;; 무서운걸. (정작 부처는 그런 극단적인 고행을 부정했고, 중도의 수행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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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잉 | 2009/07/20 17:16 | 낙원 영화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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