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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것은 우리가 즐겨 마지않는 카테고리에 한정된 페티시즘(Fetishism)이니 안심하시길. 그래도 이 좁은 카테고리의 페티시즘도 전체카테고리의 페티시즘과 동일한 성분의 슬픔을 지니고 있으니 그게 그거라고 해야 할까? 뭐 어쨋든 섹스에 한정된 페티시즘이라는 것도 발생의 매커니즘은 전자와 동일하다. ![]() 모야.이거 너무 상징적인데;;; 가장 직관적인 페티시로는 Upskirt 컨텐츠들로 대변되는 속옷에 대한 페티시가 있다. 이 페티시는 아주 흔하고, 아주 광범위하게 목격되는 것으로써, 교생의 팬티를 보거나 찍기위한 중학생들의 노력에서 부터, 일본에서 폴라로이드 사진과 함께 진공 포장해서 판매되는 여고생의 입던 팬티까지 사회의 다양한 구석에 적응하여 뿌리내리고 있다. ![]() 이 페티시즘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이렇다. 이 페티시는 감추어진것에 대한 갈망의 발현이다. 발은 항상 무엇인가로 가리워지고, 숨겨져 있는 몇 안되는 신체부위중 하나다. 비밀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지닌 신체의 일부분. 깊숙히 감추어진 맨발을 드러낸다는 것은 맨몸을 드러낸다는 것과 비슷한 충동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아무리 가까운 지인이라고 하더라도 스킨십을 허락할 수 없는 가장 부끄러운 부위중 하나이다. 더구나 발은 대부부의 사람들에게 매우 예민한 부위로, 남이 만질경우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밀려오기 마련이다. 발은 숨겨지고 가리워진 성적 충동의 상징이며, 좀 더 직접적으로는 성기의 확장적 개념이기도 하다. 발은 상징적으로 제2의 성기이기 때문에 다양한 하위 카테고리를 양산해 낸다. 일차적으로 다른 어떤 곳 보다 발을 통해서만 성적 흥분을 이룰수 있는 부류로 부터 시작해서, 성기와 팬티와의 관계처럼 여성의 신발에 성적 애착을 느끼는 부류, 혹은 레그페티시라고도 하는 스타킹으로 애착이 전이되는 경우도 있다. (이경우 하위 카테고리로 덴싱 페티시도 있다;;;). 실제로 팬티스타킹을 입고 다니는 남성분들도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이 페티시는 무형의 발냄새에 대한 애착으로까지 확장되기도 한다.(진짜) ![]() ![]() ![]() 성행위는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간의 폭력행위와 은유적으로 닮아 있다. 칼로 찌르고, 상처를 내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아마도 폭력으로 흥분한 인간과, 성적 흥분을 하고 있을 때의 인간은 동일한 화학물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성행위도 인간의 폭력과 마찬가지로, 은유적 차원에서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는 남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기력한 피해자,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져 움짝달삭 할 수 없는 환자의 모습은, 격렬한 성행위라는 폭력으로 희생된 피해자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기브스와 붕대와 반창고들은 그런 의미에서 속옷과 다름없는 것이다. 다만, 성기에 대한 상징성만을 보유하고 있는 속옷 페티시와는 달리 이런 메디컬 페티시들은 폭력을 근저에 암시하고 있다. 당연히 이러한 성적 환상과 관련된 여성의 캐릭터들은 순종적이고 무기력하며, 희미하게 죽음의 냄새를 풍길정도로는 피학적이다. 이건 현실과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 아직까지는 수동적인 상징화니까. 아직까지는 대상을 보호해야할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거니까. 문제는 이런 폭력적 행위를 성행위의 은유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능동적인 상징화를 추구하는 경우이다. 언젠가도 언급한적이 있지만,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잔혹한 연쇄 살인마 대부분이 어쩌면 인간의 고도의 상징화 능력의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나이프 페티시즘, 혹은 블러드 페티시즘, 아니면 내장 페티시즘일지도 모른다(당연히 그런장르는 없다). 삽입이라는 행위는 나이프로 복부 깊숙히를 찌르는 것으로 은유화 되고, 피는 분미물로, 내부 장기 전체는 거대한 질로써 상장화 되는 것이다. ![]()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현상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다행히도 신문에 이름석자를 장식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다름아닌 경험에 근거한다. 이론적으로야 성적행위와 폭력행위가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강력한 연결고리를 지닌 상징이 되기 위해서는, 폭력과 성행위가 연결된 개인적 경험, 혹은 트라우마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으로써의 인간이 그동안 쌓아온 사회적 자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저 상상이 아닌 강렬한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유년시절 과도한 폭력의 일상적 경험, 혹은 폭력적인 성행위의 경험, 그 외 이에 준하는 경험들. 우리는 싸이코패스의 수많은 사례에서 대부분 이와 유사한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페티시즘이라는 성적 에너지의 물신화 작업이 너무 많은 단계의 전이를 거치게 되면, 타인으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개인적 경험에 의존한 상징에 이르르게 되고, 그 경험의 질에 따라 인간 도덕과 입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강박적 행동으로 돌변하게 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방석에 성적 애착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화장실의 휴지통에 충동을 느끼고, 철봉의 쇠냄새를 맡으면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거짓말 같지만, 진실이다. 현실에는 유해 블로그로 선정되 처벌될까봐 차마 글로 옮기가가 망설여질 정도의 페티시들도 있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심연.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몇가지 리스트가 떠오를 것이다. 물론 거기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어떤 은유와 상징과 전이의 과정을 거쳤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더이상은 알고 싶지도 않다. ![]() 어떤 페티시 사이트에서 발견한 물건. 뭐에 쓰는걸까. (Urinal-Mask 라고 한다;;;) 사실, 철학 못지않게 형이상학적 개념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것에 댓가를 지불하는 것에 익숙하다. 브랜드와 패션이라는 것도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물성화해서 착용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페티시즘이다. 우리는 브랜드가 상징하는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옷을 입고, 어느 순간 옷 자체에 애착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어쩌면 강력한 페티시가 되는것이 오늘날 패션브랜드의 생존전략일 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이 장르의 페티시는 현대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물질의 양으로도, 그리고 욕망의 양으로도 천문학적인 수위를 자랑하고 있다. 난 가끔식 궁금해진다. 이런 패션으로 대표되는 양지의 페티시를 포함하여, 인간의 성적에너지가 우회하고 전이되어 분출되 나온 뒤의 음지의 페티시들의 거대한 잔해들을 보면서 의아해 진다. 이렇게 어둡고 이렇게 거대하고 이렇게 강렬한 에너지의 엄청나게 거대한 덩어리가 조그마한 인간의 몸속에 있었던 것이 맞는 지를. 무소불위의 통제불능한 욕망이 정말 일개 성행위따위의 욕정이 반사되고 굴절된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 모든 결과의 원류가 되는 성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그토록 대단한 것인지. 아니 성의 원류인 인간의 '관계'와 '생존'이라는 것이 이렇게 대단한 충동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이렇게 쓸쓸하고 어두운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 남자의 페티시즘, 토니 타키타니 감독:이치카와 준, 출연:미야자와리에,오가타에세이 누가 뭐라하던 이 영화는 페티시즘에 대한 이야기다. 태생적으로 고독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는 매게체가 필요하다. 근본적으로 '관계'라는 것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실존하는 어떤 물건으로써 관계를 상징화 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지만 낯선 감각을 설명하기 위해, 그녀의 옷에 매료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옷은 그녀에게도 그녀 스스로의 공허와 고독의 증거였다. 옷은 그녀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사랑한 것으로 생각했던 그녀의 옷은 그녀와 단 한부분도 닮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상실을 경험하고 나서야 토니 타키타니는 깨닫는다. 누가 뭐라해도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고, 누가 뭐라해도 나는 이 영화를 훌륭한 영화였다고 기억한다. 왜냐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미묘한 문체를 영상으로 완벽하게 표현해 내는 대단한 도전에 성공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니, 영화라기 보다는 영상 퍼포먼스라고나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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