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빠돌이가 될 수 없다는 슬픔



아마도 대학생으로써의 첫 여름방학 방학이었던것 같은데, 과외때문에 신천에 갔다가 신천 근처의 큰 만화책방을 갔었다. 저녁 술약속까지 시간을 떼워야만 했다. 이미 볼만한 만화는 다 봐버린 고수(;)인지라, 신간이 뭐 뭐 나왔나 부터 살펴봤다. 그런데, 신간진열대 구석탱이에, 왠 유치한 제목의 듣보잡 만화책이 5권 완결로 깨끗하게 꽂혀 있었다. 경험상 5권 완결이라면, 처음에는 그럴듯 하다가 결국 재미가 없어서 연재를 급하게 내려버린 졸렬한 작품일 확률이 많았고, 누구한테도 추천을 들어본 적도 없는 만화이니 당연히 외면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딱 다섯권 보고나면 저녁 술약속을 갈 시간이 되겠다는 생각에 이녀석을 선뜻 집어버리고 말았다.

[굿모닝 고스트].누가 볼까 챙피한 제목이라 서둘러 구석자리를 잡아 앉았다. 그림체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순정만화가 되다가 만듯한 느낌이랄까. 이게 뭐야. 책장을 한장 한장 넘겼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놓은 음료수도 한모금 들이키지 못하고 5권을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던 것 같았다. 게다가 심지어 코까지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다. 이 만화책의 어떤 부분이 나의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를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그 듣보잡 만화책이 어떤 부분에서 나의 주파수와 공명했던 걸까를 생각할 겨를없도이 술을 먹으러 갔었고, 그 뒤로 그 만화는 잊혀졌다. 당시에도 별 인기가 없었던 만화라, 이후에는 만화책방에서도 별로 마주친일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전 우연한 계기로 그 만화책이 다시 생각나게 되었고, 그 때 당연히 했어야 하는 생각을 그제서야 하게 되었다. 결국 그 만화에서 내가 감격했던 부분은, 팬덤이라는 '송신전용 사랑'에 대한 찬양이자 긍정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래, 그것도 가치있는 사랑이야."라고 처음 말해준 공공 매체의 컨텐츠였던 것이다. 나의 잊고 있었던 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그립게 한 만화였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 사랑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슬퍼했던 것 같다.

평생 가장 큰 첫 빠심을 바쳤던, 왕조현

중학시절 나도 여느 십대와 다름없이 마치 열병과도 같은 사랑에 빠져있었다. 왕조현이라는 홍콩 배우에 대한 빠심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출연한 모든 작품을 외울듯이 보는 건 기본이고, 비디오, 책받침, 사진 등등 그 당시 용돈만으로는 구하기 힘든 엄청난 아이템을 모아들였다. 비단 아이템 수집이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머릿속이었는데, 정말 왕조현을 위해 죽으라면 죽을 수 도 있는 정신상태였던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느순간 왕조현이 담배를 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담배피는 뇨자= 납쁜뇬'이라는 썩어빠진 정신이 팽배했던 시기라 그 소식은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게다가 알콜중독이라는 소문이 덧씌워지기 시작했고, 청순한 이미지의 그녀에게 이 소문의 임팩트는 꽤 커서 많은 팬들이  떨어져 나가는 지경이었다.

나? 나는 가슴이 아파 잠을 못잤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면 담배를 필까, 그녀가 얼마나 힘들면 술을 마실까. 내가 어떻게든 힘이 되 줄수는 없을까? 그런식의 걱정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심지어, 당시 공부를 열심히 했던 이유도 왕조현 때문이었으니....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그녀가 나이먹어서도 하고 싶은걸 할 수 있도록 후원해주는 사람이 되자며;;;;; 그야말로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려는 송신전용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굿모닝 고스트'는 빠심을 사랑으로 긍정해주는 전무후무한 만화였던 것이다.

자, 생각이 이 지경에 이르자 성격상 당장 이 '굿모닝 고스트' 라는 만화를 내 손위에 다시 올려 놓아야 했다. 그런데 무려 출간된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만화인데다가 인기가 없었던 녀석이라, 재판이 나왔을리도 없으니, 작업은 어려워졌다. 새책은 당연히 전혀 찾을 수 없고, 헌책도 거의 없었다. 물론 있는 것도 이리저리 처박혀 있던 녀석이라 상태도 별로 안좋았고. 설상가상으로 이녀석이 뒤늦게 인기가 생겨서 상태 좋은 놈들은 컬렉터들의 손에 다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결국 보물창고를 발견해 버리고 말았다. "좋은책많은데" . 만화책 중심의 헌책을 다루는 곳인데, 정말 말그대로 좋은 책이 아주 많은 곳이다. 상봉역 5번 출구에서 200m 라고 되어는 있다만, 어라? 200m는 충분히 지났는데? 되돌아가 버릴까 말까 할 때쯤 발견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홈페이지에 보유하고 있는 서적 대부분에 대한 정보가 올라가 있는데,  별다른 설명이 없다면 상태가 매우 양호한 책이고 상태가 양호하지 않은 책에는 거의 설명이 되어 있다. 그 보물창고에서, 아직까지 이렇게 깨끗한게 의아할 정도의 '굿모닝 고스트'를 득템했음은 물론이고, 새책이나 다름없는 FFS(이건 당췌 몇번째 구매하고 잃어버리는지), 호문쿨루스등을 살 수 있었다.

자, 때깔을 보라. 레어템이다.

막판 반전. 집에 득달같이 달려와 침대에 누워 흥분을 채 가라앉히지 못하고 책을 읽었다. 마지막 5권 책장을 덮었을때, 뭐 여전히 재미있는 만화이기는 했지만, 눈물은 단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왜 일까?  이제는 여유를 주지 않고 그 이유를 반추해 보았다. 그때는 그렇게 복받치게 슬펐던 이야기가 지금은 왜 그저 재미있기만 할까? 그때의 내가 지금보다 더 유치했기 때문일까?  슬프게도 이유는 아마 이런 것일테다. 이젠, 송신전용 사랑따위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노인이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이해타산이 맞지 않는 바보같은 사랑은 내 이야기가 아니게 되어 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을 감지하는 나의 안테나가 그 시간만큼 쇄락하여 아픔에 둔감하게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p.s. 오늘은 별거 아닌 이야기로 글이 졸라 길어졌는데, 끝까지 읽으신분이 있으시다면 그저 세가지 이야기를 한 포스트로 봤다고 위안 삼으시길. 좋은 서점에 대한 소개이기도 하고, 왕조현이라는 스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괜찮은 책을 소개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흐흐.

P.S.2. 왕조현 누님의 보너스 사진. 오래전이니 촌스럽긴 해도, 아름다우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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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잉 | 2007/10/24 13:06 | 낙원 책 | 트랙백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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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난나 at 2007/10/24 13:10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책 많은 곳과 왕조현씨와 레어템인 '굿모닝고스트'를 한 포스팅 안에서 읽다니 !!
그나저나 왕조현씨 오랜만에 뵙네요 아 예쁩니다.ㅜ.ㅜ..
Commented by 동물원 at 2007/10/24 15:22
이쯤되면 대충 쥔장의 연세(?)가 짐작되는 셈인데.. ^^ 누가 빠순이 빠돌이가 한순간이라도 아니었던 적이 있을까요? 저야 생물학적 성별상 왕조현빠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보기 좋네요. 사실 저 정도로 좋아했다면 왠지 '이 스타는 내가 키운 셈이지' 싶기도 하고 말이죠.
Commented by 오잉 at 2007/10/24 16:19
[난나]님, 감사합니다. ㅜㅜ. 역시 쓸모없는 포스트도 포장이 중요합니다.


[동물원]님, 그렇습니다. 대충 계산이 나옵니다. 그래도 연세라고 말해야 될 정도는 아니라고 -ㅂ-;;;; 말씀드리고 싶습니다.엉엉.
Commented by 이삼 at 2007/10/24 16:35
공감에서 보고 들어왔습니다.
저는 아직도 굿모닝고스트를 볼 때마다 우는 나이네요.
Commented by 제절초 at 2007/10/24 22:58
굿모닝 고스트 재미있었죠. 비슷한 만화가 또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납니다.
Commented by dizzi at 2007/10/24 23:09
굿모닝 고스트 처음봤을때
"이거 뭐지? 굿모닝 티쳐 짝퉁인가?-_-;;"
보고 난후
"스미레!!! ㅠㅠㅠㅠㅠㅠㅠ"
이거보고 호시사토 모치루 팬이 됐지만 이 작품의 포스를 능가하는게 안나와서 좀 아쉽더군요.
Commented by Aussie_Mel at 2007/10/25 00:15
아. 왕조현 언니 알흠다우십니다. 예쁜데는 촌스러움 같은 것이 없지요.
만화책.. 너무 읽고 싶어요.. 한글 박힌 것으로....;ㅅ;
Commented by 타누키 at 2007/10/25 02:03
ㅎㅎ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리빙게임으로 너무 좋아했던 작가였죠.
저는 연예인빠였던적이 한번도 없는지라..그쪽으론 별로 느끼지 못하고
읽었었는데(첫사랑이나 그쪽으로 생각해서 읽었었죠.) 그럴수도 있겠네요.
송신전용...아 힘들어요 ㅠㅠ;;
몇년전 리브로에서 전질로 할인해서 팔길래 구매했었는데
링크해주신 곳도 좋네요. +_+ 나중에 함가봐야겠습니다. ㄷㄷ
Commented by conpanna at 2007/10/25 09:56
오잉님이 다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유는 이미 사심이 끼어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음,, 그러니까 소싯적 정말 우연하고 자연스럽게 만화방에서 굿모닝 고스트를 집었을 때와는 분명 다르게 이번에는 그 책을 다시 손에 놓으려고 애를 쓴 노력에 대한 보상 등을 책에 대한 기대치에 합산해 버리진 않았나,,

딴지를 걸려는 건 아니구요, 다시 빠돌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드리고 싶어서 주절주절 풀어봤습니다.

제가 나이에 대한 허탈함을 느낄 때는 묘하게 억지 핑계거리를 붙여서라도 그 애매한 기분에서 빠져나가거든요.
Commented by 고롱고롱 at 2007/10/25 10:26
굿모닝고스트는 아무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제겐 더 귀한 책이 될거 같습니다. 카세한테 감정이입이 너무 잘돼요..
Commented by 오잉 at 2007/10/25 11:36
아, 이젠 이런 손발이 어지럽게 쓴 잡문도 이오공감에 올라가는군요;;;; 뭔가 좀 민망하네요;;;; 어쨋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이상]님, 부럽습니다. 저는 이제 왠만해선 잘 못우는 나이가 되버렸다능.
[제절초]님, 오~그런게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dizzi]님, 사실상 고스트 바둑왕에 맞먹는 좌절스런 한글판 네이밍 센스죠.
[Aussie_Mel ]님, 네 그렇습니다. 얼마전 북한 여성의 아름다움에서 그런걸 느꼈죠..
[타누키]님, 아~그럼 새책으로 가지고 계시겠군요. 부럽습니다. 송신전용이야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있을 수 있는 애정교환의 케이스죠.
[conpanna]님, 네. 게다가 유령의 정체가 밝혀지면서의 그런 충격들이 아무래도 처음보다는 덜하기도 하겠구요. 그리고 사실 비밀리에 개인적 빠돌이 활동들도 하고는 있습니다.
[고롱고롱]님, 저도 오래 잘 보관할려구요. 주변 사람들한테 많이 권해주고 싶기도 하구요.
Commented by 천년어둠 at 2007/10/25 11:38
전 나이를 막론하고 언제나 빠순이가 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뭐래
좋아하고 아끼는데는 뭐 .. 나이를 막론하자는 이야기죠 (웃음)

하지만 역시 주위에 시선이...

제목보고 왔다가 재미있게 잘 보고 갑니다.
Commented by 아람 at 2007/10/25 18:33
저도 언제까지마 빠순의 마음을 갖고 살고싶네요!!
집에서 걸어갈 수 있을정도로 가까운 곳에 이런 곳이있었다니 좋은 정보 얻어갑니다 ㅠㅠ..
Commented by 호크윈드 at 2007/10/26 13:18
원래 이 작가 작품이 메이저는 아니지만 마이너에선 꽤 인정 받는... 편이라고 할 수 있나?
이야기가 좀 튀는 듯 하면서도 굉장히 현실적이면서... 뭐랄까 마이너가 되는 게 당연할 수 밖에 없는 묘한 센스를 가진 만화죠
개인적으론 이 작가 작품 다 좋아합니다.(정말 다요 ^^ 많은 분들이 몇몇 작품은 절대 싫다는 분들도 있더라구요)
Commented by 아잉뽕 at 2007/10/26 18:28
한 명 더 생겼군, 왕.조.현. 치치!
Commented by 오잉 at 2007/10/29 11:42
[천년어둠]님, 말씀이야 맞지만은 저는 좀처럼 예전같이 불타오르지가 않더군요.

[아람]님, 네~ 지나가며 많이 들려주세요. 저도 멀지만 않으면 자주 갈텐데.

[호크윈드]님, 아, 그랬군요. 역시 꽤나 공력이 있는 작가로 느껴지긴 했습니다.

[아잉뽕]님, 예전에 좋아했었다구요. -_-;;;; 댁은 뭐 그시절에 그런거 없으셨수?
Commented by reflect9 at 2008/01/10 04:20
만화 취향이 저와 비슷하시군요. ㅎㅎ 이 다음에 나온 '진정한 사랑'이던가? 아무튼 심하게 말리는 연애 이야기가 이 작가의 특이함에 있어서는 절정이었다고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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