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외부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처참한 사고는 벌어졌다. 해질무렵의 아슬아슬한 시간대. 길을 건너 가야 하니까, 택시를 횡단보도 앞에 세웠다. 양재동에서 논현동까지 왔는데, 기사아저씨가 미터기를 안올리고 왔기에, 요금에 대해 협상작업을 벌이느라 나의 하차시간은 조금 늦춰 졋다. 문을 열고 내려서 다시 닫으려는 순간 도로쪽에서 위잉 하는 굉음과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거대한 파란색 물체가 횡단보도로 들이 닥쳤다. 쾅. 나는 그대로 얼어 붙었다. 미터기를 꺽고 왔으면 내가 있었을 자리에서 파란불을 기다리고 있던 어떤 젊은 회사원이 기묘한 형태로 몸이 구겨진체 마지막 숨을 내뱉고 있었다. 진짜 마지막 숨은 앰불런스에 탑승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그도 나처럼 힘든 외부업체 미팅을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러 회사로 들어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곳에서 구겨진 채 죽어가야 하는 데에는 별 이유가 없었다. 구형 스포티지를 몰던 아저씨가 통화를 하다가 주의가 산만해 져서, 브레이크를 밟는다는게 엑셀을 밟았고, 당황하여 더욱 있는 힘껏 밟아버린 것이다. 구형 스포티지는 신호 대기중이던 차량을 몇차례 들이받으며 튕겨져, 순식간에 횡단보도로 들이 닥쳤다. 남자는 처참하게 구겨지며 처박혔다.
스포티지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 씨발, 좆됬다. 전화기를 들었다. 통화상대는 보험사인것 같다. 짜증을 좀 내는 것 같다. 아, 빨리와요. 사람이 치었어요.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남자는 잠시 그 아저씨를 보는것 같았다. 저 새끼 때문에 내가 죽어가고 있는 건가. 병원이 아니라 보험사가 우선인건가. 어차피 죽을꺼라고 판단한 건가? 의혹, 분노, 증오, 상실감 등 온갖 변화가 스쳐가는 듯 했다. 아니, 사실 그저 죽어가는 눈빛의 변화였을지도 모른다. 둘러싸 수근수근 구경하는 인파속에서 결국 119에 전화를 한 것은 나였다. 그리고 왠지 그가 나대신 죽어가는 것 같아 미안했다.
실수는 용서 받을 수 있다. 내가 실수로 엑셀을 밟아 당신의 소중한 생명을 해쳤군요. 정말 가슴이 아프고 슬퍼요. 저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요. 평생 짐이 될 것 같아요. 제발 저를 용서해 주세요. 죽어가는 남자는 그런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자신이 용서해 줘야 할 사람. 하지만 구형 스포티지의 운전자는 그저 좃됐다, 큰일났다, 짜증난다의 표정이었다. 용서를 갈구하는 죄지은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스스로를 걱정할 뿐이었다. 병원은 보험사에서 오면 의논하고 부를 작정이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구겨진 남자가 죽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는지도 모른다. '아씨, 저새끼 죽으면 좆되는데.'
죽어가는 남자가, 이 모든것을 정말로 인식했다면, 운전자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했을 것임은 당연하다. 그는 원한을 품고, 운전자를 용서하지 않은 채 죽어갔을 것이다. 운전자는 왜 용서받으려 하지 않았을까? 그는 왜 자비를 갈구하지 않았을까? 정답은 내 눈 바로 앞에 있는 그 차의 꽁무니에 적혀 있었다. [OO교회]. 그 스티커를 보는 순간 억측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그를 용서할 권리는, 그 자랑스러운 채권은 이미 구겨진 남자에게는 없었다. 운전자가 어느날 예수를 믿어버린 그 순간, 그의 죄는 사하여 진 것이다. 예수께서 그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죽어가는 남자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용서의 권리는 그분에게 있을 테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과 결과들에 대해서 우리의 의사가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미치길 갈망한다.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지 마음대로 흘러간다는 사실은 매번 목격하면서도 절대로 믿겨지지 않는 진실이다. 세상에 물리적으로 원인과 결과가 있듯, 우리의 삶에도 인과가있기를 갈망한다. 그렇듯, 누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다면 우리에게는 그의 죄를 사하여 줄 권리가 생긴다고 믿고 있다. 죄지은자는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고, 그것은 인과론에 의해 우리만이 죄책감을 해소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 용서라는 건 자비가 아니다. 사실, 용서라는건 권리다. 어떤 특권이다. 상대는 '죄지은 자'이고 나는 그 죄에 대한 채권자가 된다. 나는 그 죄에 대한 용서의 권리로 인해,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설 수 있게 된다. 발 밑으로 내려보다가 '그래, 용서할께'라고 말하는건 일종의 우회적 복수이며, 긴 쾌락이다. 퍼석퍼석하기 이를데 없는 인간의 삶에 내려진 자유의지의 달콤한 증거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그 권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우긴다.
마치 가입만 하면 PSP도 주고, 노트북도 싸게 사게 해주고, 게임타이틀도 주고, 한경희 스팀청소기도 주고,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주는 인터넷 전용선 서비스처럼, 믿기만 하면 모든 죄악이 한큐에 해결된다. 반대로 아무리 용서만으로 세상을 살아왔더라도 믿지 않으면 죄인인 것이다. 원죄? 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죄-용서'라는 인간이 창조한 개념으로만 이루어진 비교적 확실한 인과관계를, 그분께서는 잔인하게도 다시 부조리 상태로 내 던져버린 것이다. 죄와 용서의 시장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독점으로 얼룩져있다.
아아.
세상이 이토록 가혹하고 이토록 냉담하고 이토록 랜덤한 것은 그분의 성향의 반증인 것인지, 그분의 부재의 반증인것인지.
밀양 / 이창동 감독 / 전도연, 송강호 주연
조디포스터 주연의 브레이브원의 예매날짜를 고민하다가, 이 영화가 생각났고, 곧 생각에 빠져들었다. 죄와 용서와 복수라는 테마. 건조한 묘사를 가장한 이 영화는, 누구든 자기 나름의 잣대로 해석하라는 듯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이 영화는 분명하게도 인간의 깊은 상처속에 무섭도록 잘 스며드는 이스라엘산 연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납따위가 들어있는... 싸고 손쉽고 위안이 되겠지만, 결국에는 해로운 것이다. 그 따위 연고에 의존하는 것 보다는, 인간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치유력을 믿는 것이 살 가능성은 높은 것이다.
ArborDay 님의 밀양 관련 글
"스스로를 마주하기-밀양" 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링크한번 걸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