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공공장소에서 여대생의 나체를 군중과 함께 찬찬히 관찰했던 결정적 순간. 2000년 겨울, 잠실 신천에서 술약속이 있어, 성당앞 사거리에서 이리저리 인파를 관찰하며 기다리던 중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라 사람들은 넘쳐났고, 신천이라는 동네 특성상 근처에 사는 대학생들이 많았었다. 뭐 누가 더 취했나 경연장 같은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무리가 있었으니, 20살을 갓 넘긴듯한 대학생 무리였다.
겨우 걸음을 가눌 수 있을 정도로 취한 남자 넷과, 그거보다 더 취해 배에 구멍난 좀비처럼 걸어오는 여자 한명. 땅을 겨우 딛고는 있는듯한 여자아이는 꽤 이쁘장했고(그러니 남자넷이 달라붙었지), 스웨터에 청바지가 무척이나 단정해 보였었다. 그래서 더욱 눈에 들어왔고.... 문제는 인파가 가장 많이 몰려있는 성당 사거리에 그 좀비무리가 도착했을때 벌어졌다. 여자아이가 한가닥 남아있던 정신을 기어이 놓쳐버린 것이다.
여자아이를 업거나 부축하기엔, 남자애들 네명도 너무 많이 취해 있었다. 그래서 이 바보들이 내린 결정은, 여자아이 팔, 다리를 네명이서 각각 하나씩 잡고 어떻게든 택시가 들어오는 큰 길가까지 나가자는 것이었다. 각자 사지를 하나씩 부여잡고 걸어간지 10초도 안되 사건은 발생했다. 여자아이가 입고 있던 스웨터가 (당시 유행했던 녹색 폴로) 허물이 벗겨지듯 훌러덩 벗겨져 버린 것이다. 당연히 여자아이는 바닥으로 풀썩 놓쳐졌고, 남자아이들 손에는 스웨터만 남았다. 아, 말려올라간 브레지어까지 같이 남아있었다. 사거리 한복판에 상반신을 완전히 드러낸 이쁘장한 여대생이 대짜로 누워있는 상황.
남자아이들은 수습할 생각도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화가 난듯) 지나가는 차를 차거나(왜?) 고개를 파묻고 씨발 하거나 그러구 있었고 덕분에 그 여자아이는 십분 넘게 그 상태로 널부러져 있었다. 인파는 구름을 이루었고, 나는 그자리에 쭈욱 있었던 덕분에 맨앞에서 보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갖고 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과연 체면불구하고 찍을 수 있었을지는 -_-). 공공장소에서의 무방비 누드라는 최고의 컨텐츠를 눈앞에서 보고 있었고, 이 곧 사라질 순간을 영원히 남겨놓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벗겨진 상반신이 주는 비주얼의 충격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야기 둘.
얼마전의 결정적 순간. 욕망을 배설하기위한 좀비 무리들이 바글거리는 종로3가의 유흥가.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글대는 피아노 건반 모양의 조형물에 걸터앉아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노숙자와 일용직 노동자의 중간정도의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행색의 남자. 이 남루하고 비쩍 마른 늙은 남자는 철퍼덕 바닥에 앉아서, 버터링 쿠키 상자를 왼손에 들고, 한입 베어문 버터링 쿠키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남자는 입을 조심스럽게 오물거리며 버터링 쿠키를 천천히 먹으며, 동시에 상자를 처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
아마도 이 버터링 쿠키는 이 남자의 오랜만의 사치였을 것이다. 이 버터링 쿠키를 입에 넣는 것이 커다란 욕망이고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 하루, 단 하나의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하루종일 눈앞에 아른거리던 그 달콤한 쿠키를 드디어 구매하여, 종로 길바닥에 앉아 먹고 있다. 그래, 이 맛이었지. 정작 그 욕망이 입안에서 해소되기 시작하자 생각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슬펐다. 천원짜리 쿠키 조차 '당신의 인생은 왜 이렇게 초라해?'라며 비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눈빛이었다.
번화가의 넘쳐나는 인파의 넘처나는 욕망과, 초라한 늙은이의 절망스러운 욕망의 대비효과는 나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그 단 하나의 비주얼, 그 원씬만으로 엄청난 이야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곧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카메라는 꼭 이렇게 필요한 순간에 없더라. 다시는 보기 힘든 이 순간을 담아 둘 수 있었을텐데... 이 남자의 슬픔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었을텐데....
이 두가지 이야기는 차이가 없다.
소유하고 싶은 결정적인 순간을 놓쳐버렸던 무용담이다.
나는 늙은 남자를 보면서 연민을 느꼈지만, 그의 가난과 고통을 같이 아파하고 싶어 사진을 찍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연민을 일으키는 바로 그 순간. 여대생의 새하얀 상반신 나체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그 결정적인 비주얼. 바로 그 비주얼을 기록해서, 언제든 그 감정을 꺼내볼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 노인의 묵직한 고통과 불쾌를 다시한번 곰씹는 것은 나에겐 불쾌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타인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서 떨어져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연민을 느끼며, 이런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확인시켜주는 컨텐츠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를 여행하며, 우리들이 쉽게 찍어대는 가난한 아이들의 모습. 우리는 싸이질과 블로그질을 하며, 그 연민에 가득찬 감수성을 마구 쏟아내곤 하지만, 그건 위선이다. 아니 위선을 넘어선 죄악이다. 당신은 타인의 가난이라는 습습한 감정을 소유하고 싶었을 뿐이다. 니가 니 자신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사진속의 그들은 당신을 보고 있다. 타인의 고통을 소유하려는 당신의 어두운 욕망을 보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기자는, 결국 자살했다고 한다.
그가 정말 독수리를 쫓고 아이를 구했다고 하더라도,
이 장면이 눈에 들어왔을때,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자신을 지배하던것이
흥분과 어두운 예술적 욕망이었다는것까지 부정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래, 바로 이런 순간을 기다렸어. 이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할꺼야!
'유레카!'
우리는 카메라의 힘을 빌어, 객관성과 정당성과 박애주의로 위장하여 그들을 찍지만,
그들은 자신의 두눈으로 사진을 찍는 당신을 보고 있다.
자신의 비참한 고통을 영원히 박제하려는
우리의 비틀어진 욕망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고있다.

타인의 고통 / 수전 손택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이 책으로 수전 손택이라는 사람을 처음 만났던게 2004년 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사진에 관한 책을 하나 더 읽었고, 우울한 열정이라는 인물평전도 읽었고,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인상깊었던 논문집도 읽었다. 알랭 드 보통을 문헌적 사색가라고 한다면 이 분은 시사적 사색가라고나 할까. 당연히 보통씨와는 달리 현실을 항상 마주보고 있다. 그렇다고 현실적이고 아주 읽기 쉬운 책을 쓰는 분은 아니다. 행간을 읽는데에 조금 집중이 필요하다.
사실 이 책은 예술 애호가인 그녀가 예술을 비판한 책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껏 '타인의 고통'은
찍는 비겁함을 이야기 했다면, 수전손택은 사진과 그림을 매게체로 타인의 고통을
'보는'우리의 위선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타인의 고통을 보는 우리의 관음적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타인의 고통이 재료가 되고 인간이 사물이 되는 현상에 대해 토로한다. 타인의 고통은 우리가 무고함을 느끼게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연민을 느끼는 것 만으론 부족하며, 그 이미지를 넘어 인간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녀가 백혈병으로 죽어버린 뒤, 다시는 이런 날카로운 사색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아쉬움에 한번 권해 본다. 물론 이 책은 새로운 깨달음을 충족시켜주기도 하지만, 당신의 관음증도 일부분 충족시켜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