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 생각해도 속이 무척 쓰린 기억인데, 한 2년전 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복도식 아파트의 약점인 복도측 방범창을 통해 들어왔다. 창살을 어린이만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벌리고 들어온 뒤, 유유히 대문으로 나갔다. 의외로; 재산의 피해도 꽤 컸다. 보석류의 폐물과 금붙이만 싹슬이 해갔는데, 몇가지 행사를 치룬 2년차 살림이라 그게 상당한 금액이었다. 모조보석과 진주등은 엄정하게 감별하여 값어치 없는건 고스란히 남겨두고 갔다. 노트북이나 기타 전자기기들은 처치곤란인지 그대로 두었다. 경찰말로는 전문가 소행이란다.

신혼집이 도둑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주변 지인한테도 많이 들어봤지만, 막상 당해보니 금전적 손해를 떠나 참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여기 저기 나있는 발자국과 정체모를 타인의 체취, 지문. 그야말로 며칠 걸려 집을 미친듯이 청소하고, 많은 물건들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 한동안 집에 들어갈때 마다 가슴이 두근 두근 거렸고, 한동안 내 집에 정이 뚝 떨어지는 상태를 겪게 되었다. 강박적으로 방범 도구들을 몇개나 지르기도 했었다. 아마도, 나에게 꽤나 강력한 트라우마가 되었나 보다.

사실 이 사건이 더 충격적이었던 건, 범행이 발생할 당일 아침에 나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던 꿈 때문이었다. 꿈의 내용은 이랬다. 나는 복도측 두개의 방 중 침대가 있는 작은 방에 누워 있었다. 보통 안방에서 자니까 이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다. 여튼 누워 있다가 낌새가 이상해서 창문쪽을 쳐다보니, 왼쪽 창문에 이상한 그림자가 비추어 있었다. 창문이 블러처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형체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방을 샅샅이 훓어보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의 엄청난 악의와 조우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야말로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덩달아 같이 깨어나, 왜 그러냐고 묻는 아내에게 이런 이런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했다. 내용은 다르지만 그녀도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그땐 그게 무슨의미인지 상상도 못했다. 그저 기분나쁜 개꿈이겠거니 하고 출근을 준비했다.


그리고 정확히 꿈속의 그림자가 나타난 부분


그리고 도둑은 그날 둘다 출근한 이후 오후 어느 시간엔가 들어왔다. 그는(혹은 그녀) 작은 침대방의 오른쪽 창의 창살을 벌리고 들어와 범행을 저질렀다. 꿈속에서 그림자가 지켜보던, 바로 그 곳이었다. 쉽게 생각하자면, 어머 신기해, 예지몽 아니야, 이럴수도 있겠다. 주변의 반응도 그랬고. 하지만, 정작 꿈의 주체였던 내 느낌은 조금 이상했다.

그런 느낌이었다. 그 꿈은 무언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하는 신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꿈은 이미 겪은 일이 트라우마화 되어 나타나는 악몽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꿈을 꾸었을 당시에는 사건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굳이 말하자면 "미래에 대한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을테다. 트라우마라는 건, 당연히 과거의 일에 대한 정신적 외상이어야 하는건데,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해 내가 이미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충격적이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뒤죽박죽 되는것 같은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재로도, 과거, 현재, 미래 따윈 없는건가. 익히 들어왔듯 우주의 시공간에는 이미 모든 사건이 발생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뇌는 그걸 일정한 방향으로 플레이하는 DVD플레이어 같은 존재. DVD라는 매체 자체에는 모든 영상의 장면이 그저 한꺼번에 기록되어 있을 뿐 순서따위는 없다. 그저 플레이어가 그걸 정해진 순서로 플레이하는 것 뿐이다. 이론적으로는 우리의 우주라는 시공간도 그런 존재니까. 프로그램 작동 오류 따위로 나는 다음에 플레이될 화면을 미리 '영사'했던 것일수도....그렇다면 나는 우주라는 시공간의 실체를 꿈으로 경험한 것이 아닐까;;;

 
"과거, 현재, 미래는 인간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끈질긴 환영이다"


상대성 이론을 통해, 고전 물리학적 시간관념을 뒤 흔들고 새로운 시공간의 개념을 확립한 아인슈타인에게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바로 자신이 발견해 낸, 시간이라는 존재의 의미였다. 뭐 시간이라는 존재의 무의미함이라고 해석해도 좋다. 짧은 지식으로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은 절대변수가 아니라 각각의 관찰자의 운동상태에 의존해 있는 매우 개인적인 개념이라고 한다. '상대'라는 단어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시간의 상대성은 관찰자 혹은 관찰 대상의 속도가 빠를 수록, 혹은 거리가 멀수록 더욱 상대적이 된다. 저 멀고 먼 우주 구석에 한명의 관찰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고전물리학적으로는 그가 느끼는 현재와 내가 느끼는 현재는 같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일어나서 걷는 순간, 혹은 그가 우주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순간 그와 나의 현재는 몇백년의 차이가 생긴다. 이 생각을 좀 더 확장하면, 현재, 즉 무언가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지금이라는 순간은 동시에 몇백년과 몇천년을 아울러야 하는 개념이 되며, 결국 이 우주에는 이미 모든 사건이 발생해 있다는 결론에 이르르게 된다.

물론 이건 이론적인 상상이다. 하지만, 브라이언 그린의 책에서 읽었던 한 실험에 따르면, 양자의 세계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뒤엉키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자세한 상황은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실험을 통해 방출된 양자수준의 미립자가 이미 실험을 실시하기 전에 일종의 감광판에 소량 도달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이런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에 충격을 받는다.

아인슈타인이 고뇌했듯,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즉 시간이라는 것은 그저 인간의 의식속에 강박적으로 나타나는 "강력한" 환영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저주처럼 말이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 1 - 8점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살림


심심하던 차에 집어든 "시간 여행자의 아내"라는 제목의 책. 조금만 읽으려고 하다가 단숨에 읽어 버리고 말았다. 앞서 언급한 사건에서 느꼈었던 단상과 너무 깊은 싱크로율을 보여준 책이었다. 웹상에서의 부정적 반응을 보면, 감성적이기는 하되 설정이 너무 황당무계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자기도 모르게 시간을 이리저리 여행하는 주인공이라는 설정을 바탕에 둔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저자의 상상력은 시간관에 대해 뚜렷한 지식을 바탕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마도 저자의 아이디어는, 이미 모든 일이 벌어져 있는 시공간을 한 방향으로 밖에 여행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반추 끝에  떠올랐을 것이다.

이런 확신의 증거는 저자의 시간여행자에 대한 설정에서도 나타난다.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은 엄청난 초능력이거나, 아니면 신의 도움으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유전자에 이상이 생긴 병이라는 것. 이 병으로 인해 마치 고장난 DVD플레이어처럼 의도치 않게 시공간을 랜덤하게 플레이 하게되는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다. 시간의 이곳 저곳을 종횡 무진으로 읽어대는 주인공의 복잡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그의 유언장의 마지막 문구에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의 의도 일테다.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야"

영화는 어떨지 모르지만, 책은 꽤나 훌륭했다. 물론, 개개인의 스키마에 따라 매우 다르게 읽힐수도 있는 책이지만, 로맨스로써도 가족소설로써도 만족스럽다. 그리고 우주적으로도. ㅎㅎㅎ

가장 현대물리학적이라고 느꼈던 헨리의 대사. 



"내 인생 전체가 단 한번의 길고 긴 기시감인걸,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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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잉 | 2009/11/11 17:47 | 낙원 책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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